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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람들 26 황정산-쓰기 좋은 그릇을 만들고싶은 도공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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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66,466회 작성일 18-08-2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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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조선사기가 아니오. 우리 어렸을 때는 왜사기라 불렀어요.” 아버지의 아버지대 이전부터 가업으로 삼아온 그릇 굽는 일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서동규(62)씨는 두 개의 그릇을 꺼내 놓았다. 작은 종지만한 그릇은 작가의 도장을 빼고는 티끌조차 하나 없는 순백이었다. 또 하나의 그릇은 그야말로 ‘개밥그릇’이었다. 모양은 일그러진 데다 귀까지 빠져 있었다. 서씨가 바지춤에 그릇을 문지른 뒤 건넸다. “뺨에 대보시오.” 화려한 순백의 그릇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못생긴 그릇은 달랐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다. 서씨는 그 따뜻함을 이제 막 걸음을 뗀 손녀의 볼을 만지는 것에 비유한다. 이런 질감이 있어야 비로소 조선백자라는 것이 서씨의 설명이었다.

오로지 이 땅에서 나는 흙과 이 땅에서 자란 소나무 불길만이 이런 그릇을 빚어낼 수 있다. 이런 그릇들을 옛 사람들은 도자기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막사발이었고 사기그릇이었고 물항아리였다. 도자기라는 말은 일본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릇은 쓰자고 만드는 것입니다. 놓고 보는 것은 그릇이 아니지요. 물을 담으면 정수가 되고 음식을 담으면 맛깔이 더 나는 그런 그릇이 좋은 그릇이지요.” 서씨의 말은 옛 도공들의 그릇 만드는 자세였을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드물게 온전히 경상도의 산으로 남아 있는 황정산을 바라보고 앉은 방곡마을에서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지금도 밭에서 돌보다 더 많이 나오는 백자 사금파리들, 그리고 구점, 아랫점, 웃점, 옛점터, 사기점 등의 지명은 방곡마을 그릇 역사의 조각들이다.

월악산과 소백산 두 국립공원을 남북으로 세우고, 동서로는 황정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 벌재와 도락산 빗재에 감싸인 방곡마을이 그릇과 연을 맺게 된 것은 흙과 소나무 때문이었다. 단양에서 방곡마을로 들어오려면 ‘그릇을 빚는 고개’ 빗재를 넘어야 한다. 빗재에 서면 억겁의 세월이 빚은 화강암 봉우리들의 수려한 자태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 화강암이 풍화된 모래 성분의 흙에 진흙 성분이 섞이면 단단한 그릇을 얻을 수 있는 ‘사토’가 되고, 화강암 성분을 고스란히 간직하면 ‘물토’가 된다. ‘사토’에 점도가 높은 흙을 보태면 그릇의 뼈가 되는 ‘소지’가 되고, ‘물토’에 재를 섞은 것이 그릇의 살인 유약이 된다.

달리 도구가 없던 시절 흙을 녹여 그릇을 만들기에 필요한 불힘을 얻으려면 소나무가 최고였다고 한다. 황정산에는 조선 숙종 때 황장금표를 세웠을 정도로 인근의 산에 질 좋은 소나무가 지천이었다.

물토에 재를 섞은 유약이 빚어내는 흰색은 그저 하얗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버드나무 재가 섞이면 남한강 푸른 물빛을 닮은 청빛이 흐르고 소나무를 태운 재를 섞으면 소백산의 봄을 닮은 연두색이 피어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재가 섞이면 그릇 빛은 하늘의 구름을 닮는다고 한다.

이런 방곡그릇은 양반네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방곡의 그릇은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한 그릇이었다. 농민들의 힘겨운 노동을 이기게 해주는 새참그릇이었고 탁주가 담기는 사발이 됐다.

방곡의 전성기는 놋쇠그릇이 징발당하던 일제시대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기그릇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방곡가마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릇을 사러 오는 보부상들도 제 마음대로 그릇을 고르지 못했다고 한다. 가마에서 내온 그릇이 재작(저잣)거리에 놓이면 보부상들은 담뱃대며 부싯돌 따위의 자신들의 소지품을 그릇 앞에 두고 자리를 비켜야 했다. 그러면 그릇주인들이 적당히 그릇을 나누고 소지품을 그 앞에 두면 보부상들은 군말없이 그 그릇값을 치렀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재작거리라는 지명이 옛 영화를 말해준다. 한 사기가마에서 일꾼들 한 끼니로 쌀 한 가마가 뚝딱 날아가던 그 시절 방곡에는 주막의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방곡의 영화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할 때까지 지속됐다. 양은그릇에 밀리고 알루미늄 플라스틱 등이 들어오면서 방곡은 요강에서 활로를 찾았다. 스테인리스 요강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소리’가 비교적 작게 나는 사기요강이 인기였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인지라 중앙선 철도가 들어오는 단양이 가까운 방곡은 특수를 누렸다. 빗재길도 소달구지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험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어서 빗재 넘어 대강면에서까지 일꾼들이 찾아들었다. 소죽이 끓는 새벽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대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한 지게에 요강을 36개씩 지고 빗재를 넘었다 한다. 고개를 오르다 지치면 지게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고개를 내려오면서 가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아래에 놓아두었던 지게를 지고 오르고, 또 잠시 쉬었다 지게 하나는 두고 다시 오르고…. 그렇게 고개를 넘어 사인암까지 가야 소달구지를 이용해 단양역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요강특수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택개량 사업이 시작되고 공동화장실이 사라지면서 요강수요도 줄었다. 게다가 플라스틱그릇은 값도 싼데다 깨지지도 않았다. 생활도자기는 더이상 수요가 없었다. 그나마 수요도 현대식 시설로 무장한 대규모 공장에서 나오는 값싼 생활도자기 몫이었다. 도공들은 떠났다. 가마가 헐린 자리에는 콩이 자라고 감자가 심어졌다.

잊혀지던 방곡마을에 도공들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97년이었다. 단양군청은 예산을 들여 방곡도예촌을 세웠다. 70∼80년대 한국도자기의 명인으로 꼽히던 많은 이들도 이곳에서 그릇을 배우고 불길을 익혔을 정도로 유명했던 방곡도자기의 전통을 살려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현운요, 옹기나라, 죽연도요, 감월도요, 산당요… 등 10여개의 가마들이 새로 방곡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의 주인들은 옛 방곡도자기 사금파리 한 두개씩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방곡도자기의 전통을 살리겠다는 각오들이기 때문이다.

현운요 조태영(50)씨는 대구에서 가마를 옮겼다. 방곡의 사토를 섞으면 거칠지만 순박한 맛이 더한다. 조씨가 10여년에 걸쳐 개발한 유약이 만들어 내는 숲 무늬 도자기는 그대로 월악산이고 소백산이다. 조씨의 바람은 사람들이 음식만 보지 말고 그릇도 함께 봐주는 것이다. 조씨는 그래야만 100% 방곡도자기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가마를 옮긴 지 2년여 만에 충청북도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고 제천 마스코트인 온달장군을 캐릭터로 이용한 입체퍼즐을 만드는 것도 도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려다 옹기장이가 돼 옹기나라를 열었다는 이재준(35)씨는 “그릇은 만드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희귀한 도자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는 ‘쓰기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방곡의 도공들은 좋은 그릇은 시대가 만든다고 입을 모은다. 청자의 빛을 재현하는 것보다 현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릇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동규씨가 느릅나무 재와 물토만을 이용해 세제를 쓰지 않고도 기름때를 말끔하게 씻어내는 생활그릇 녹자를 만든 것도, 이재준씨가 발효음식이 많은 우리나라 음식문화에 더욱 쓰임새가 많도록 옹기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오늘도 물레를 돌리는 것도, 결국은 흙의 생명력을 사람들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6-황정산-쓰기-좋은-그릇을-만들고싶은-도공들의-고향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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